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르웨이 침공 (문단 편집) ==== 릴레함메르 전투 ==== 트론헤임 방면으로 파견된 영국 육군 제146여단과 제148여단의 경우에는, 트론헤임이 이미 독일군 손아귀에 떨어졌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대체항구인 남소스와 안달스네스 항구로 상륙하기로 결정했고, 146여단은 트론헤임 북동쪽에 있는 남소스로, 148여단은 트론헤임 남서쪽에 있는 안달스네스로 향했다. 하지만 남소스와 안달스네스는 항구의 규모 자체가 너무 작은데다가, 피오르 지형도 좁고 굴곡이 많아서 대형 수송선이 통과할 수 없는 등 상륙조건이 나빴다. 결국 양 여단 모두 바다 한가운데에서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구축함이나 노르웨이 어선 등을 이용해서 물자와 인원, 장비를 옮겨실은 끝에야 상륙이 가능했다. 덕분에 애초부터 준비한 물자와 장비가 부실한데다가, 환적과정에서의 혼란으로 인해 170톤이나 되는 무기와 식량을 실은 수송선이 그대로 영국으로 돌아가버리는 등의 악재가 발생했고, 남소스에 상륙할 병력이 나르비크로 향하는 배에 옮겨타는 등의 사건이 발생해서 전력손실이 상당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간신히 상륙한 영국 육군의 모습도 [[개판오분전]]이었다. 일단 상륙시 지참한 식량과 장비, 물자는 고작 이틀치에 불과했고, 군수성에서 극한지용 장비라는 이름으로 긴급제작해서 나누어준 방한복은 그걸 입었을 경우 그냥 걸어가는 것 자체가 힘들 수준으로 투박하고 무거운 등 장비의 질이 좋지 않았다. 물론 전차와 같은 중장비를 보유하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영국군은 노르웨이군이 애타게 필요로 하는 여분의 무기와 장비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 소총 탄약도 영국군은 7.7mm, 노르웨이군은 6.5mm로 [[구경]]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사용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노르웨이군은 빈약한 무장과 장비를 제대로 개선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은 노련한 군인이라기보다 흡사 미들랜드 지방의 제철소 노동자들을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노르웨이 육군 대령 로셔 닐센 설상가상으로 영국군의 인원 자체도 질이 개판이었다. 평시에는 약간의 상비군으로만 유지되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급속도로 확충하는 영국군의 특성상, 이 시점에서 영국군은 프랑스에 파병한 4개 사단분의 병력을 제외하면 막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신병과 동원소집된 [[예비군]]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영국의 노르웨이 원정군 병사들은 [[박격포]]와 [[기관총]]같은 각종 공용화기를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박격포와 기관총의 조준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군사지식에 깜깜했다. 덤으로 병력 대다수가 상대적으로 따듯한 남부 잉글랜드 출신이라서 북극권의 혹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암담한 실정이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이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146여단과 148여단은 트론헤임을 포위하고, 독일군 주력이 오슬로 방면에서 북쪽으로 돌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느린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즉각적인 독일군의 통렬한 반격에 직면하고 말았다. 4월 21일에 최초의 교전이 노르웨이 중부에 위치한 릴리함메르에서 영국군 148여단과 독일군이 전투를 벌임으로써 일어났는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독일군의 과감한 돌격으로 릴레함메르가 독일군에게 함락당함과 동시에 148여단이 사실상 붕괴된 것이다. 여단장이 여단 지휘소까지 적군 기관총탄이 난무하는 위급상황에서 벗어나서 약 100km까지 후퇴한 후에 간신히 여단 병력을 수습한 결과, 원래 1천여명이었던 병력은 3백여명으로 급감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낙오병들은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거나 눈 덮인 동쪽 산맥을 넘어서 스웨덴으로 도망친다던지, 험악한 서쪽산맥을 돌파해서 해변에 도달한 후 노르웨이 어선을 집어타고 [[스코틀랜드]]로 도망가는 등 지리멸렬했다. 이런 사정은 146여단도 마찬가지였다. 트론헤임을 점령하고 있던 독일 제181보병사단은 쿠르트 보이티슈 준장의 지휘하에 즉시 영격에 돌입해서 남소스와 트론헤임의 중간지역인 슈타인케르에서 4월 21일 오후부터 격전을 벌였다. 게다가 영국군이 좁고 험한 산길에 직면해서 그나마 가진 중화기를 제대로 운반하지 못하는 사이에, 독일군은 박격포 등을 완전분해한 다음에 사이드카에 싣고 전장까지 운반해서 재조립하는 창의성을 보였으므로 화력에서도 큰 열세를 맞이했다. 결국 20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146여단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설상가상으로 4월 22일에는 트론헤임 해상에 대기중이던 독일 해군 구축함이 함포사격까지 날려내는데다가, 바다쪽으로부터 우회한 독일군이 남소스 항을 점령하는 바람에 퇴로까지 끊어졌다. 그나마 완전 전멸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해당 여단에 속한 링컨셔 대대의 지휘관인 허버트 중령이 어린 시절에 해당 전장 근처로 [[낚시]]하러 왔던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에는 슈타인케르 읍 동쪽에 오래된 나무다리가 있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미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 지 십수년이 지나서 시커멓게 썩어가는 다리를 통해서 수백 명의 영국군이 오그나 강을 건널 수 있었기 때문에 146여단은 간신히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146여단도 148여단처럼 지리멸렬했으므로 전투력은 바닥을 친 상태였다. 이렇게 트론헤임 방면에 투입한 146여단과 148여단이 붕괴된 사실을 영국 육군성이 알아차렸다. 게다가 4월 24일에는 독일군이 잔존한 영국군 패잔병을 박살내면서 안달스네스까지 점령하고자 급속진격하던 긴급사태였으므로, 3800여명 규모에 부대원 전원이 현역 정규군으로 구성된 육군 제15여단을 버나드 T. 파제트 소장의 지휘하에 안달스네스로 급파했다. 15여단은 중동의 팔레스타인 식민지에서 산악전의 경험까지 쌓았기 때문에 앞서 파견된 2개 여단에 비해서는 엄청난 정예였다. 그러나 15여단이 이전에 148여단이 진격한 길을 따라서 전진을 시작하자, 4월 25일부터 벌어진 전투는 15여단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돔바스 남방 60km지점의 크밤 마을 근처에서 독일 전차의 공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진행되었는데, 15여단이 소형 [[대전차포]]로 독일군 전차를 격퇴하자 [[Ju87]] [[급강하폭격기]]의 공습을 받기 시작했고, 15여단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진지를 구축하는 사이에 다른 독일군이 우회기동을 해서 안달스네스 항구를 일시적으로 점령한 후, 그곳에 있던 영국군의 예비식량, 장비 등을 노획하거나 불태웠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군의 다음 공습에서는 노르웨이와 영국간의 교신을 중계하는 기지로 사용 중이던 라디오 송신소가 날아가는 바람에 영국 본토에 지원요청을 하기 어려운 사태까지 발생했다. 결국 4월 28일에는 영국 정부도 트론헤임 방면 전투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미 3개 여단이나 투입했지만 사상자만 1,559명이나 발생하면서 신나게 관광당하는 처지라 시간이 더 지나가면 전멸당할 위기에 놓인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철수로가 독일군 입장에서도 훤하게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다. 원래 노르웨이는 주요 도시가 해안가에 위치해 있고 도로가 잘 발달하지 않은데다가 산간 마을간의 통로는 험악한 산길이나 좁은 협궤철도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니 제공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독일 공군에게 후퇴하는 영국군이 사격 표적처럼 신나게 공격당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런 공격을 뚫고 160km의 진격로를 되돌아나온 148여단과 15여단의 잔존병력은 안달스네스 항구로 귀환했으며, 공습이 미약해지는 야간에 해상철수하는 상황이고, 영국군 패잔병들이 삼삼오오 흩어져서 안달스네스 항구로 오는 상황이었으므로 철수작전은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재탈환한 남소스 항구의 경우에는 짙은 안개로 인해 철수선박의 진입이 어려워서 5월 3일부터 철수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배에 탔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서 해상까지 추격해온 독일 공군의 공습에 선박 일부를 상실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노르웨이 남부~중부 전선은 4월 말이 되면 모조리 독일군 손에 떨어지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